Monday, June 25, 2007

세번째 지리산

내가 왜 그랬을까? 힘들다는걸 잘 알면서 왜 그랬을까? 무슨 생각으로 갔다 온걸까?

...

갑형님과 승윤과 함께 지리산 종주를 할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산에 가본지도 꽤 됐고, 또 주말에 바람도 쐬고 싶었고, 뭔가 정리하고 싶었던 것도 있고, 또 간만에 16기가 함께 하는 자리이기에 기분좋게 출발을 할 수 있었다.

제작년 지리산 종주를 했을때를 기억한다.

정말 무슨생각에서였는지 발목 보호도 안되는 운동화에 아무런 대책도 준비도 없이 그냥 쫄래 쫄래 갔다가 완전 고생했었다.

다른거 보다, 무릎이 나가서 내리막길에서 엄청 고생했던걸 기억한다.

이번엔 준비를 좀 했다.

등산화도 하나 장만하고, 스틱도 준비했다.

퇴근을 하고 승윤을 만나 용산역으로 가니, 곧 갑형님이 왔다.

용산역 이마트에서 함께 먹거리 장을 보았다.

준비부터 시작해서 제작년의 기억을 떠올린다.

세석산장에서 그저 그런 밥을 해서 먹고 있을때, 거의 대부분이 진한 냄새 물씬 풍기며 맛있게 먹던 고기가 가슴 한켠에 응어리져 두고 두고 날 괴롭게 했다.

때문에 이번엔 고기도 샀다.

장을 보고 저녁을 먹고 기차를 타고 출발한다.

아직은 기운이 철철 넘친다. 정신도 말짱해서 잠도 잘 안온다.

22일( 금 ) 저녁 10시 50분 차를 타서 23일 오전 3시 30분에 구례구에 도착했다.

구례구에서 버스터미널에 잠깐 들린뒤 성삼재로 버스를 타고 갔다. 아직 어둡지만 그다지 춥지는 않았다.

산을 오르기 시작할때부터 막연한 두려움이 앞선다.

이번엔 얼마나 힘들까?

이번엔 준비 좀 했다 싶은데 무릎은 괜찮을까?

장마라는데 비가 오면 어쩌나...

2년 동안 나의 체력을 나이와 반비례하여 분명 떨어졌을텐데, 괜찮을까?

이런 저런... 겁만 많아진듯 하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런 저럭 생각않고 그냥 좋을 생각으로만 시작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산행은 시작되고 장마 덕분에 경치는 잘 보지를 못했다.

오전에 비는 오지 않았으나, 잔뜩인 구름덕에 뭔가를 보고 느끼기엔 힘들었다.

더군다나 오후부터는 거센 비바람이 몰아쳐서 정말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고 구름속에서 비를 맞으며 갔다.

이때는 사진 조차 찍을 수도 없었다.

특히나 장마 덕분에 비가 온다는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난 왜 아무런 대책을 하지 않았을까?

비가 올 수록 무거워 지는 옷 덕분에 몸은 더욱 둔해지고, 산장에 도착하여 뽀송뽀송한 옷으로 갈아입을 생각에 버티었건만 베낭속까지 모두 젖어 무엇으로도 갈아입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몸과 옷에서는 비와 땀에 쩔은, 11년만에 맡아보는 통선대 냄새가 났다.

몸과 옷에서의 냄새를 맡는 순간, 그 냄새에서 연상되는 기억이 딱 통선대라니... ㅋ 진하고 강한 그 통선대 냄새...

난 준비성이 없다. 귀찮아하는걸까? 좋게 말하자면 예측할 수 없는 모험 및 닥치는 상황에서의 돌파를 즐긴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비 덕분에 질퍽 미끄러운 길과 둔해진 몸으로 고생을 했다.

항상 몸이 젖어있기에, 비바람이 거세진 산장의 취사장에서는 더욱 추웠다.

배가죽이 등에 닿고 허기가 몰려와 손발이 떨려야 하는게 정상인데, 몸이 천근만근에 추워서 그런지 그냥 막 자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무겁게 싸온 고기를 승윤은 포기하지 못하기에...

귀찮지만 준비해온 고기와 음식들로 배를 채우니 기분은 좋아졌다.

두사람은 소주도 한잔씩 하고, 이런 저런 얘기도 하고... 이렇게 셋이 모여본게 언제 인지 기억도 나질 않는다.

청년회에 있으면서 내게 큰 의지가 되어주는 두 사람이 난 참 좋고 고맙다.

난 산장에서 잔적이 없다.

이곳 지리산에서도 설악산에서도 난 산장에서 잔 적이 없다. 늘 취사장에서 잤었다.

예약을 못하거나 늦게 가거나 자리가 없거나 등등의 이유로...

이번엔 갑형님이 예약을 잘해놔서 산장에서 잘 수 있었다.

산장에 좋으면 얼마나 좋고 따뜻하면 얼마나 따뜻할까라고 생각했었으나, 정말 좋았고 정말 따뜻했다.

만일 이런날 밖에서 잤더라면 난 아마 얼어 뒈졌을지도 모를일이다. 참 다행이다.

젖은옷도 다 말리고 아주 따뜻하고 편하게 산장에서 푹 자고 일어났다.

남들은 모두 새벽 4,5 시에 일어나 천왕봉으로 향하는데, 우리는 6시가 되어서야 일어나서 아침을 먹고 출발했다.

어제 밤까지만해도 그칠줄 모르게 거세게 오던 비는 아침에 조용해 지더니, 이내 그쳤다.

다행이도 이전처럼 무릎이 아프거나 근육이 땡긴다거나 하는건 없었다.

역시 장비의 힘은 대단하다!

비는 그쳤으나, 날씨는 변화무쌍하여, 해가 떴다가 먹구름이 쭉 몰려왔다가 등등 호화찬란한 날씨쇼를 하고 있었다.

장터목산장까지는 새파란 하늘을 볼 수 있었으나, 천왕봉에 가서는 정말 아무것도 볼 수 없는 희뿌연 구름속에 있었다.

우리가 많이 늦었는지 우리가 천왕봉에 갔을때는 아무도 없었다.

지리산에 3번째인 갑형님과 나, 그리고 첫번째인 승윤, 반응이 다르다.

아직 젊은 승윤은 좋다고 하고, 갑형님과 나는 이제 산을 끊기로 한다. -_-;;...

너무 힘들었다.

갑형님은 제작년까지 괜찮았던 무릎에 신호가 왔고, 난 몸은 괜찮으나, 비 덕분에 완전 힘들었다.

제작년 산행을 통해, 등산화와 무릎 보호대의 소중함을 알았다면, 이번엔 등산복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

중산리로 내려오는 지겨운 내리막을 끝으로 산행을 마무리 했다.

그 시점에서 당장은 다시는 산에 오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내가 왜 그랬을까? 힘들다는걸 잘 알면서 왜 그랬을까? 무슨 생각으로 갔다 온걸까?

갈때는 그래, 힘들기 위해 산에 가는거야. 라고는 하지만, 막상 끝내고 나서 당장은 힘든거만 생각날 뿐이다.

그리고, 현재 시점에서, 화장실에서 나온 나는 힘들었던 기억보다는 재밌고 좋은 기억만 산행의 사진들을 보며 또 후에 가겠다라는 생각을 한다.

사진을 많이 못찍어서 아쉽다.

갑형님과 승윤과 함께 산행해서 너무 좋았다.

거의 4년을 알고 지냈으나, 조금씩 서로가 바빠지면서 제대로 술자리 한번 갖기 힘들었는데, 이렇게 2박 3일동안 산행을 하면서 옆에 꼭 붙어있고 얘기도 하고 함께 힘들 수 있기에 더욱 소중해지 내 사람이라는 생각이 강렬히 생긴다.

진주 원지에서 저녁 6시 40분에 출발해서 남부터미널에 10시에 도착하여 12시 까지 뒷풀이를 하고 헤어졌다.

지금은 다리 근육도 땡기고 졸립지만, 가길 잘했다는 생각이, 아니 정말 같이 갔어야 했다라는 생각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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